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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영북의 관문 운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시민기자 이정식


ⓒ시민기자 이정식
영북면의 운천을 처음 가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포천에서 운천으로 이사한 아는 분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70년대 말 운천은 화려하고, 번성했다. 당시 포천군의 군청 소재지는 포천면이었지만, 절대다수의 인구는 영북에 살고 있었다. 영북 운천이 번창한 이유는 바로 미군 부대 때문이었다. 미군 사단이 주둔하던 영북 일대는 마치 동두천처럼 엄청난 수의 미군이 왕성한 소비력을 쏟아 냈다. 비록 전방 지역이었지만 당시 포천면에도 없던 나이트클럽이나 호텔 같은 것이 있었다.

ⓒ시민기자 이정식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산정호수나 명성산을 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관문인 운천터미널은 1975년 문을 열었다. 내가 처음 가 본 1979년 운천 터미널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어머니 손을 놓쳐 파출소에서 울면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사건까지 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 이국적인 백인과 흑인은 왜 그리 많던지. 의정부에 놀러 갔을 때 보다 더 많은 외국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음악 소리, 취객과 장사하는 이들의 고성 등이 마치 이곳이 서울 한복판 같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시민기자 이정식
미군 부대가 사라지고 운천은 급속히 쇠락했다. 많은 사람으로 붐비던 운천 시외버스 터미널도 영광스러운 과거를 뒤로 한 채 한산해졌다. 최근 동두천의 미군 부대가 철수하면서 발생할 지역 경제의 어려움 등을 고려하여 정부가 나서 지원을 한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1982년 영북에서 미군이 철수하던 시절엔 그런 배려 같은 것은 없었다. 미군 부대만 바라보던 지역 상권은 정부나 미군의 변변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만 어려운 상황을 버텨야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속절없고, 냉담했던 시절이었다.


ⓒ시민기자 이정식
아직도 운천 시내는 번성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널찍한 신작로와 가게들이 남아 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만 사라진 셈이다. 그래서일까. 모처럼 찾은 운천 시외버스 터미널은 한산하고, 쓸쓸했다. 예전처럼 북적이지는 않지만, 추억과 세월을 간직한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만나고 헤어졌을까? 얼마나 많은 이의 기쁨과 슬픔이 연출되었을까? 예전처럼 많은 사람이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시민기자 이정식
시간의 흐름마저 느린 것 같은 대합실에 잠시 앉아 옛 생각을 떠올리니 절로 추억여행이 되었다. 역시 터미널은 여행의 설렘을 갖게 한다. 게다가 동서울 터미널에서 오는 고속버스가 있어 운천 터미널은 고속버스 전산망 속에 166번이라는 터미널 번호를 가지고 있다. 운천 시외버스 터미널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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