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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의 3대 충신 조득남 정려

시민기자 변영숙

여행자에게 가장 반가운 일은 우연히 길을 걷다, 혹은 차를 타고 지나가다 ‘문화재’나 그와 유사한 감흥을 불러일으킬만한 대상을 발견했을 때일 것이다. 그것은 특이하고 개성적인 건축물이어도 좋고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카페여도 좋고 지방의 작은 미술관이나 동네 서점이어도 좋다. 여행 가이드북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자주 멈추게 하는 곳이 많은 곳이 가장 흥미로운 여행지이다. 경험상 그런 곳은 고장의 연혁이 길고, 이래저래 공사에서 공과를 세운 인물이 많은 고장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포천은 아주 흥미로운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시민기자 변영숙

얼마 전 우연히 포천군 가산면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조득남 정려’를 방문하게 되었다. 뉘엿뉘엿 저무는 가을 햇살이 들판에 살포시 내려앉아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마치 운명처럼 그 햇살이 도로변에서 비껴 서 있는 정려각을 여행자의 가시권으로 끌어낸 것이다. 평번한 농촌 마을에 정갈한 분위기의 정려각은 매우 ‘특별’하게 보였다. 갈 길이 바빠 그냥 지나치려다 결국 후진을 해서 차를 멈춰세울 수밖에 없었다.

 ⓒ시민기자 변영숙

조득남 정려각 (포천군 가산면 마산리, 향토유적 제44호)

ⓒ시민기자 변영숙

조득남 장군의 정려각이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려각 안에 정려비가 세워져 있었다. 한자에 대해서는 문맹에 가까워서 비문을 해독할 수 없지만 장군의 약력과 출중중 행적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을 것이다.

ⓒ시민기자 변영숙

조득남 장군은 조선 인조 때의 무신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순국한 충신으로 포천에서 추앙하고 있는 3대 충신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1594년 포천현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성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621년(광해군13)에 무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여 병마만호에 임명되었다. 병마만호는 조선 시대 각 도의 여러 진에서 마병과 보병을 통솔하던 무관직으로 종사품에 해당한다. 스물일곱 나이에 꽤 막중한(?) 자리에 임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민기자 변영숙 

이후 1627년 정묘호란(인조5) 때에는 강화로 피난 가는 왕을 호위하였고 1630년 (인조8) 3월에는 유흥치가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서, 정충신과 함께 출정하여 평정하였다. 같은 해 4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평안북도 가도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자 출동하여 진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민기자 변영숙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수어종 이시백의 휘하에서 성을 지키다가 결국 청나라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병자호란 1년 그의 겨우 마흔두 살이었다. 참으로 애석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인조는 수포를 내려 수의용 수포를 내리고 남한산성 북문 아래 임시로 매장토록 했다. 영조1년(1725)에 신하들의 건의로 충신 정려를 내렸다. 최초의 정려는 그가 태어난 화현면 화현리에 세워졌으나 훼손되었다. 이후 2001년 지방 유림과 후손들의 힘으로 지금의 자리인 가산면 마산리 둔지 고갯마루에 복원 건립되어 있다.

ⓒ시민기자 변영숙 

정려각 옆에 정려비를 복원하면서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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