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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밥 장수의 아들 재상이 되다!
약봉 서성 선생묘 탐방기
시민기자 서상경

수능일이 다가온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예년보다 다소 늦게 치러진다고 한다. 예로부터 시험은 학생들만의 과제는 아니었다. 부모의 헌신이 뒤따랐다. 자식 교육을 위한 맹모삼천지교라는 말도 생겨났고 오늘날은 서울의 강남 8학군으로 이사를 하는 신맹모들도 많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약봉 서성 선생의 묘를 찾았다. 약봉 선생도 어머니의 남다른 자식 사랑 덕을 보았다고 하니 말이다.

서성 선생의 묘는 포천시 설운동 산 1-14에 위치한다. 43번 국도 철원 방향으로 송우리를 지나 설운3통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800m 들어가면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35호 서성 선생 묘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성과 부인 여산 송씨의 합장묘이다. 서성은 1586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던 중 1613년 광해군 때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단양과 원주 등에서 1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고 1624년 이괄의 난 때와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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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성 선생 묘  ⓒ 시민기자 서상경

서성은 155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현기이고 호는 약봉이다. 아버지는 서해이고 어머니는 고성 이씨다. 서성이 첫 돌을 지날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된 고성이씨는 아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집을 처분하여 한양으로 이사하였다. 서성은 자라면서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어느 날 스승 구봉이 제자들의 재질을 시험해 보려고 “너희들 중에서 누가 방 안에 있는 나를 문밖으로 유인하여 내보내겠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서성이 “방안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을 문밖으로 나가시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문밖에 나가 계신다면 제가 방 안으로 들어오시게 하겠습니다.”하였다. 이에 어디 한번 해 보거라 하며 문밖으로 나갔다. 이때 서성은 “제가 방안에 계시는 선생님을 문밖으로 모셔냈습니다.” 하니 그때서야 선생은 깜짝 놀라며 그의 술책에 속은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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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성 선생 묘 표석  ⓒ 시민기자 서상경

서성이 자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어머니 고성 이씨였다. 5세 때 악질에 걸려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였다. 15세에 서해와 결혼하였으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지금의 서울 중구 중림동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릴 적 명문가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배운 약밥 만드는 솜씨와 술 제조법을 배웠기에 귀한 손님들에게 대접하였는데 맛이 좋았다고 한다. 여기서 약밥, 약과, 약주라는 말이 생겨났다. 혹자는 그녀가 이곳에서 술과 떡을 내다 팔았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유래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3▲ 서성 신도비  ⓒ 시민기자 서상경
 
고성 이씨의 헌신적인 노력은 서성의 일생에 영향을 주었다. 1586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조정의 여러 관직을 거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로 호종하였고 함경도로 피신했던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가 왜적의 포로가 되자 기지를 발휘하여 두 왕자를 무사히 구출했다. 그는 전쟁 중에 병조좌랑에 임명되어 군대의 숫자와 군량미 등을 관리하였는데 이는 왕이 그를 신임하여 군사 실무 책임을 맡겼기 때문이다.

1608년 선조가 임종할 때 신임하던 일곱 사람의 신하를 불러 영창대군을 부탁하였는데 서성은 일곱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혹독한 신문을 받고 단양과 영해, 원주로 옮기면서 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다시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1631년 4월 18일에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 74세였다. 서성은 성품이 강건하여 어떤 일이 옳다고 여기면 굳게 믿고서 실행하였으며 자신을 굽혀서 남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생활을 검약하게 하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며 죽을 때는 자제들에게 자기 장례를 후하게 치르지 말도록 당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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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성의 묘역  ⓒ 시민기자 서상경

그의 묘는 아버지 서해와 할아버지 서고의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 고성 이씨가 한양에서의 자리가 어느 정도 잡히자 시아버지와 남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던 것이다. 이장할 때의 이야기 한 토막. 이장을 하는데 날이 어두워 노숙을 해야 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 커다란 기와집으로 안내하더니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기와집은 간데없고 풀밭이었다. 길을 떠나기 위해 상여를 드니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묻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서고와 서해의 묘라고 한다.

어머니 고성 이씨의 풍수 안목 덕분인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서성의 집안은 조선 명문가로 번창하게 된다. 고성 이씨는 4남 7녀를 두었는데 장남 서경우는 인조 때 좌의정, 넷째 서경주는 선조의 장녀 정신 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는가 하면 서성의 후손들은 조선말까지 문과급제자 122명,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 3명, 대제학 6명 등 숱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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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의 문인석  ⓒ 시민기자 서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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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주변의 가을 풍경  ⓒ 시민기자 서상경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에 비견되는 고성이씨. 그녀의 맹모지교는 서성 선생은 물론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면서도 자식을 잘 기르고 가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포천의 들판을 바라보는 서성 선생의 묘 앞에 앉았다. 단풍이 유난히 고운 가을날이다. 미천한 사람 앞에서도 거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선생의 성품은 어머니의 그것과 매우 닮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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