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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묵직한 울림이 있는 곳 -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시민기자 변영숙


1Ⓒ 시민기자 변영숙

종현산과 왕방산에 둘러싸인 포천시 신북면은 서쪽과 남쪽으로 포천천과 외북천이 흐르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고을이다. 전체 면적의 75%가 산과 들이지만 인조의 왕자인 인평 대군묘와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30호)와 선조 때의 명상 이덕형과 조경을 배향한 '용연서원', 신라 시대 대학자인 최치원을 배향한 '청성사', 면암 최익현과 그의 현손인 최면식을 배향한 '채산사', 독립운동가 '최면식 선생 공적비' 등 역사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74세라는 최고령 의병장 최익현과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최익현의 현손 최면식이 태어난 고장으로 묵직한 역사의 울림이 있는 고을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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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기자 변영숙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12월 5일 (그 당시) 포천군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최익현 선생은 1855년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1875년 개항에 반대하여 이른바 ‘지부복궐척화의 소’를 상소하고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 척사 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에는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 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군중현 등 을사 5적 처단을 강력히 주장했다.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 순창에서 체포되어 대마도로 압송되었으나 그곳에서 항일의 일환으로 단식 투쟁을 하다 1906년 11월 17일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장에 추서되었다.

44Ⓒ 시민기자 변영숙

신북면 포천시립도서관에서 그의 호를 따서 ‘면암로’로 명명된 길을 따라 느린 걸음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면암정이란 현판이 걸린 작은 정자가 나온다. 정자에 올라 아담한 연못을 마주하니 은거의 삶을 택한 선비라도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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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기자 변영숙

다시 길을 재촉하니 5분도 안 돼 최익현 선생의 생가터가 나온다. 양옆으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들과 작은 텃밭에 둘러싸여 있는 ‘생가터’는 별도의 구역 표시가 없이 입구에 기념탑과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생가터로만 알고 한참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마을 주민께서 다가오더니 “생가터는 저쪽이에요.”라며 조금 표지석과 조금 떨어진 집을 가리킨다. 아마 생가터에 누군가 집을 짓고 사는 모양이다.

채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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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기자 변영숙

면암 선생과 그의 손자 최면식의 영정을 모신 채산사는 생가터에서 약 5분 정도 떨어진 야트막한 구릉에 위치해 있다. 채산사는 1906년 처음 건립된 이후 철거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현재의 건물은 1975년 해체 복원하였다. 1986년부터 현손 최면식의 위폐와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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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기자 변영숙

청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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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산사 위쪽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대 유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청성사가 있다. 최치원은 일찍이 당나라에서 과거에 장원 급제를 하고 관직 생활을 하였다. 879년 민란을 일으킨 황소에게 보낸 격문으로 문장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현실 정치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의 삶을 살았다. 청성사는 1768년 처음 영중면에 건립되었으며 그의 호를 따 고운 영당으로 불렸다. 1935년 현 위치로 옮겨지며 청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청성사에 봉안된 영정은 1740년에 해인사에 있던 최치원의 영정을 모사해 그린 것이다.

최면식 선생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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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기자 변영숙

청성사에서 내려와 청성사길을 따라 도서관 앞으로 오면 이번에는 ‘최면식 선생 공적비’를 볼 수 있다. 염재 최면식 선생(1891-1941)은 면암의 둘째 아들 위당 최영학의 장남이다. 포천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염재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4년 군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로 입국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5년 군자금 마련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전답 2,000평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1921년 광복단 사건으로 대전에서 체포되어 무기수로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형독 악화로 석방되었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41년 7월 3일 목숨을 거두었다.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 비는 1982년 포천군 출신 독립유공비 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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